[강철의 연금술사] 교양소설로서의 소년만화(초스압)

[강철의 연금술사] 교양소설로서의 소년만화(초스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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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신에게 버림받은 시대의 서사시'로 규정한 것은 헝가리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였다. 그는 커져가는 유럽 파시즘의 광기를 보고 "저들(파시즘)뿐만 아니라 서구로부터 우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에게는 파시즘만큼이나 서구자본주의가 인간의 타락한 형태로 보였던 것이다. 이같은 타락한 시대에서 "자신의 영혼을 입증(I go to porve my soul)"하러 떠나는 이야기를 '근대 소설'로 규정한다.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세계에서 그것을 찾으러 떠나는 이야기.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양시키는 이야기라 하여 '교양소설bildingsroman'이라 이름 붙여진 이 이야기는 이처럼 근대의 자장 속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강철의 연금술사>(이하 <강연>)는 이 같은 정신과 같은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The way of the world)야"

 

 

 

 


 

 

 만화책 <강연>1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에는 의의가 없다. 사람은 어떤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 이것이 <강연> 전체를 꿰뚫고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지불해야 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1을 얻기 위해서는 1을 잃어야 하기에 이 법칙은 기본적으로 '제로섬(zero-sum)'의 형태를 띠고 있다. <강연>을 보다보면 수학적 혹은 과학적인 지식(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들이라든가, 몸안의 탄소로 무기를 만든다든가)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등가교환의 법칙'과도 상당히 잘 맞는 다. '제로섬'과 같은 '등가교환의 법칙'은 인간의 개입여부와 상관없이 항상 진리다. 예컨대 탄소의 분자구조를 바꾸면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고 연필심이 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와 상관없이 진리이다. 그래서 수학법칙은 '무시간적'이다. 시간이나 역사개념과 결부되지 않은채로 존재할 수 있다.

 

 

 

 

 여기쯤오면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것이다.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에는 의의가 없다. 사람은 어떤 희생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니까."라는 대사는 오히려 시간이나 역사 개념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이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말해질때는 오히려 '무시간적'이 되어버린다.(앞의 것을 '변증법적', 뒤의 것을 '형식논리적'이라 부를수 있을 것이다.) 등가교환의 법칙이 지닌 이 묘한 역설, 무시간적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이라는, 변증법적이면서 동시에 형식논리적이라는 역설은 이 만화의 작가가 얼마나 탁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 알게 해준다. 단순한 양극의 대립구도가 아닌 하나의 진술안에 모순되는 두 개의 의미가 공존한다는것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의 갈등이 외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이 추구하는 그 목표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다. 이는 여타의 소년만화들이 끊임없이 적들을 만들어내며(이러한 예의 가장 끔찍한 표본은 <블리치>와 <신 구미호>다) 이야기를 연명시키는 것과 달리, <강연>의 이야기가 완결적이고 다소 폐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과 에드가 인체연성에 실패한 이유는 '시간적'인 영역까지 '무시간적'인 것으로 오해한데서 기인한다. 에드워드 엘릭이 연성을 하고나서 만나는 소위 '세계'라는 존재가 '진리'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신체를 앗아가는 장면은 그들이 '법칙(진리)'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연금술이 이해하고 분해하고 재구축하는 것이라 한다면, 인체연성을 금지하는 이유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해, 분해, 재구축'의 영역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해될 수 없는 것(혹은 이해하면 안되는 것)을 이해하려는 순간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다시 한번 만화의 대사를 끌고 와보자.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교훈은 없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자면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수를 거쳐야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에드가 '무시간적 진리'를 오해함을 통해 '시간적 진리'로 나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무엇에 대한 은유인가.

 

 

 작품내에서 연금술사는 현실에서 과학과 수학의 위치를 포함하고 있다.(라디오를 연금술로 단박에 고치던 에드를 떠올려보자) 비유하자면 고대 그리스에서의 철학처럼 거의 모든 학문을 포함하고 있다. 작중에서 연금술사는 상당히 높은 국가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정부 자체가 실상 연금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적어도 작품세계내에서 연금술은 "세상의 이치"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작품 내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근대'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다. 작중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차'가 그것을 증명한다. 주지하다시피 기차는 가장 유명한 근대의 상징이다. 증기기관, 역동성, 승객은 가만히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문의 풍경(이것은 영화에 대한 은유이다). 최초의 영화가 다름아닌 기차가 역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기차를 타고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강연>에서 기차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만화 초반에 기차 속에서 테러리스트를 만나는 장면, 부서진 오토메일을 고치러 기차를 타고 윈리에게 가는 장면 등등. 뿐만 아니라 자동차나 전화기, 무기 등도 근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강연>의 세계관은 스팀펑크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은가) 또 끊임없이 민족간의 분쟁이 일어난다는 점 역시도 서구의 근대와 상당히 닮아있다.

 

 더 중요한 것은 '등가교환의 법칙' 역시도 근대적인 가치체계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수치화, 이해 할 수 있다는 믿음,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모든 가치가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교환가치의 체계'에 편입되는 현상 등. 물론 '교환가치'가 모든 상품을 동질화 시키는 것과 달리 <강연>내에서의 연금술은 그정도 힘까지 지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식과 도식과 있으면 짠하고 변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은 상당히 자본주의적 체계와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강연>의 세계관은 '연금술'이라는 만화적 요소만 더해졌을 뿐이지 실상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보자.

1) 아픔을 동반하지 않은 교훈은 없다는 <강연>의 주제의식

2) <강연>의 세계관과 근대의 세계관이 같다는 가정

 

둘을 종합해보면 근대에 대한 반성은 근대 "속에서", 근대라는 경험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근대를 비판하기 위해 근대 너머의 세계(낭만적으로 미화되는 과거 혹은 장밋빛 미래)를 무조건적인 선으로 찬양하는 무책임한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세계의 진보는 세계가 지니고 있는 모순이 지양됨에 따라 가능하다고 본 헤겔철학과 닮아 있는 것이다. 헤겔에 있어 '모순'이 진보의 원동력인 것처럼, 엘릭 형제에게 아픔(시간적 진리와 무시간적 진리라는 진리의 '모순성')은 그들이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이다.

 

뤼시앵 골드만은 근대소설의 주인공들에 대해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타락한 세계와 방법은 자본주의적 근대와 그 근대 속의 원칙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타락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한다. 이를 <강연>에 대입해 말해보자면, '타락한 현실(<강연>의 세계)속에서 타락한 방법(연금술)을 통해 진정한 가치를 찾고자 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는 "나는 내 영혼을 입증하러 떠난다"와도 같은 맥락에 있는 말이다. 현실을 거부하거나 변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영혼(진정한 가치)'을 입증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찾는 '영혼-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

 

 처음에 에드와 알은 단지 죽은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 연금술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어머니'가 그들이 찾고자하는 진정한 가치일까? 어머니는 하나의 은유이다. 고대로부터 어머니는 '세계'를 의미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이아나, 러시아인들이 조국을 부르는 '어머니 루시' 등. 찾고자 하면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이 어머니는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시간적, 변증법적 의미의 '등가교환의 법칙', 즉 진정한 진리와 동일선상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아이를 낳는다는 어머니 고유의 능력은 연금술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인 것이다. 시간적으로 절대 되돌릴 수 없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강철의 연금술사 내부에서 어머니라는상징 속에서 하나가 된다. 즉 어머니는 생명의 탄생이라는 최상의 변증법적 가치를 지님과 동시에, 에드와 알에게 있어 그것은 작품의 시작부터 잃어버린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이는 근대소설을 "신에게 버림받은 시대"라고 말한 루카치의 관점과 조응한다. 즉 교양소설과 <강연>에게 있어 어머니의 상실은 작품이 시작될 수 있는(시작되기 위한) 출발점이다.

 

 위 장면에서 첫번째 진리(형식논리적, 무시간적 진리)와 두번째 진리(변증법적, 시간적 진리)는 정확히 대비된다. 전자가 제로썸이라면 후자는 플러스썸이다. 전자가 단순한 변화라면 후자는 생산이다. 전자가 비인간적이라면 후자는 인간적이다. 전자가 개인적이라면 후자는 공동체적이다. 

사실 자본주의가 오로지 전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만큼이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산적이며 협업을 필요로하는 체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의 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문제는 근대성이라는 것이 '변화', '역동성', '생산'이라고 할 때에 오로지 자본주의만이 이 근대성의 영향을 받지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다른 것은 다 변하는데 왜 자본주의는 안변하냐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힘이 바로 저 근대성에서 온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역사를 '발전의 도정'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끔 하였고 현 사회는 후에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본주의를 영구불변의 보편적인 체제로 보는 시각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논하기에는 이 자리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는 다른 부분에 좀더 집중하고자 한다.

 

 에드와 알은 어머니(진정한 가치)를 잃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타락한 방법(연금술)을 통해 만들고자 한다. 어머니를 다시 만드는 방법을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머니가 상징하는 '세계'를, 즉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한다.(이것을 라캉적으로 해석하여 대문자 A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에드와 알은 스승 밑에서 연금술을 배울 때 "하나는 전체, 전체는 하나"라는 진리를 배운다. 이것은 동양적인 깨달음이기도 하지만, 이 만화의 배경과 다른 요소들을 고려해봤을 때 오히려 지극히 서양적인 깨달음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one for all, all for one'이라는 이 명제는 헤겔의 것이다. 헤겔은 이를 <정신현상학>의 이성 장에서 논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성위에서 참다운 정신인 '인륜성'이 구현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강연>은 에드와 알의 여정을 통해 인륜성(공동체)을 구현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을 끌고 올 필요는 없다. 초등학생정도의 지식만 있어도 강철의 연금술사의 주제의식을 이해하는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싶은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1)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2) 여기서 호문쿨루스의 위치는 어디인가? 다시 말해 호문클루스는 무엇의 은유인가?

3) 만화의 결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1)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에드와 알이다. 혹은 주변인물까지 더해 로이머스탱, 호크아이 등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관대한 독자라면 '모두'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교양소설'과 유사한 양식을 지닌 것으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진정한 주인공은 누가 되는가? 사실 작품 전체의 비중은 알폰스보다는 에드워드에게 조금 더 치중된 감이 없지않아 있다. 예를 들어 오토메일을 고치기 위해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감을 의미한다. 알폰스는 갑옷 조각들만 있으면 얼마든지 고칠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는 '영혼'을 입증하러 떠날 필요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알이 에드에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실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꽤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사실 육체가 없는 존재, 혹은 육체가 기계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들은 영혼(seele)에 대해 항상 불안감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 고민을 철학적 논리 위에서 했던 최초의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육체를 기계로 보고 동물들을 해부할 때 동물들이 내지르는 소리를, 기계의 마찰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는 데카르트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일체의 사실(수학적 사실까지도)을 회의하여 명증한 자아, 소위 우리가 코기토(cogito)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생각인 이유는 첫째, '나는 생각한다'에서는 결코 '나는 존재한다'라는 존재개념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이유, 둘째로는 입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자아는 육체의 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자아는 육체를 초월한 영혼의 영역이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을 이어주는 부분이 필요한데, 그는 연결부위의 역할을 뇌에 있는 '송과선'이 담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것은 없다.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에서 전유한 기계속의 영혼(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철학적 개념은 이렇게 탄생한다. 하지만 여전히 영혼(자아)의 입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결국 '나는 존재한다'라는 무시간적, 무공간적 명제가 '나는 앞으로도 현실 속에 존재할 것이다'라는 시간적, 공간적 명제(현실적 명제)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신존재증명'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자아가 확실히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확증은 오직 신의 은총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실상 스콜라철학의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관념론이 '세속화한 신학'이라는 비판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근대에 수학과 과학이 지배적인 가치체계가 되었을 때 근대는 다시 한번 데카르트의 길을 가게 된다. 위 장면의 알폰스와 같이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지 못하는 것을 한나 아렌트는 '데카르트의 악몽'이라 부른 바 있다. 이는 수학과 과학이 처할수밖에 없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수학과 과학처럼 무시간적인 논리체계(물론 양자물리학까지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디까지나 근대를 기준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에서는 아주 단순한 것들 조차도 확언하기 위해서는 항상 검증을 거쳐야하며, 그 검증을 거치고 나서도 끊임없이 다시 의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문제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수학적, 과학적으로 검증한 것이 다르다는 데서 기인한다. 즉 우리는 감각적으로는 땅이 평평하다고 느끼지만 망원경을 통해서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 개념의 전도가 일어난다. 이제 "진리는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는 것만이 진리다." 

 

 누구보다도 연금술(수학적, 과학적 체계)에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연금술사야말로, 그중에서도 육체가 없는 알폰스야 말로 영혼을 입증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알폰스는 영혼(진정한 가치)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영혼을 입증하는 것은 그의 남은 영혼을 걸어서만 가능하다. 이 역설(마지막 남은 영혼을 버려야만 영혼을 입증가능하다는)을 구현하는 장면이야말로 <강철의 연금술사>가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뤄내는 지점이다. 물론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내용은 다른 소년만화에도 자주등장한다. 하지만 단순히 판타지 속에서 모험을 하다가 영혼을 거는 만화와 컨셉, 배경, 캐릭터 설정, 내용, 형식이  조화로운 조응을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영혼을 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것은 서사에 종속된 캐릭터(이야기의 차원이 너무 거대하여 캐릭터가 견디기 힘든 경우, 대표적으로 나루토)혹은 캐릭터를 위한 서사(매력적인 캐릭터를 설정하고 다양한 상황들을 통해 그 캐릭터성을 소비하는 만화들)가 아니라, 서사와 캐릭터,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보자면, 이야기 초반에 쇼 터커 에피소드(나는 이 에피소드가 만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에피소드라고 확신한다)에서 나나를 지켜주지 못했을 때와 어머니를 인체 연성하다 실패했을 때를 제외하곤 에드워드는 단 한번도 자신의 영혼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그 이후로는 한번도 '모험'을 한적이 없다. 모험이란 자신의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강렬한 확신이 밑바탕에 있는 인물들(나루토, 루피, 이치고)은 모험을 모른다. 그들은 입으로만 모험을 하지 그 모험 속에서 단 한번도 자신의 존재자체를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저  세 주인공은 자기 행위에 대한 반성따윈 하지 않는다.(저 세 만화가 삼대장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징후적이라 할 만하다) 저 셋에 비하면 에드워드가 훨씬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마지막에 '진리'와 대면하여 어린소녀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밑바탕에는 항상 나나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알폰스에 비할바는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마지막에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호문쿨루스와 싸우는 에드의 모습은 소설 속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고대 서사시의 주인공(민족의 운명을 담지하고 있는 인물, 이런 인물은 공동체와 자기를 분리하지 않는다)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은 소년만화라는 매체의 한계에서 오는 어쩔수 없는 한계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소년만화의 주인공은 악당을 이겨야하기 때문이다. 반면 알폰스는 그 장면을 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지불한 탓에 세계 너머에서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형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겼다.(이긴것은 에드워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연성이 성공했는지 안했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단지 믿음을 통해서만 그런 모든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는 것이다. 개인의 극적인 도야, 초월이 아닌 죽음을 향한 그의 도야는 어쩌면 이 세계에서 혼을 입증가능한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2)

 이런 점에서 비추어보면 호문쿨루스는 무엇인가? 그를 이해하는 한가지 키워드는 일곱가지 대죄이다. 본래 일곱가지 대죄는 토마스 아퀴나스(그 이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가 규정한 것인데 그 이후로 대죄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로 자리잡는다. 기독교와 근대의 연관성에 대한 유명한 논의로는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그 요지는 세속적 금욕주의가 전통주의적 경제윤리로부터 재화획득을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고 이윤추구=신의 뜻이라는 등식 속에서 자본의 축적과 부의 생산적 사용을 이뤄 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문쿨루스의 정체는 명확해진다. 그는 모든 욕망을 초월한 금욕주의적 자본주의의 화신이다. 모든 인간적 욕망을 자신에게서 분리해내어 신적인 존재(금요주의적 자본주의의 화신)가 되고자 한다. 그런 다음 욕망들을 세상에 풀어놓은 다음, 자신의 뜻에 맞춰 대죄를 조작하여 세상을 움직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후에는 스스로가 신이되어 세계를 완전한 원환적 체계 속에 가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자본주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다. 베버 역시 자본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으며, 벤야민 역시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라는 미완성 논문에서 자본주의를 "제의만 남은 종교"로 파악한 바 있다. 사람들을 현자의 돌로 만드는 연금술이라는 것 자체가 '제로섬'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것이 사실 근대 자본주의의 성격이기도 하다. 아동의 노동마저도 착취하여 공장을 돌리는 악독한 부르주아의 이미지를 호문쿨루스에게서 본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렇게 본다면 연단술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것은 긍정적인 자본주의적 원리, 제로섬이아닌 플러스섬의 수학과 과학일 것이다.

 

 

3) 

 결말에서 실제로 바뀐 것은 없다. 호문쿨루스는 처치했지만 세계는 여전히 분쟁중에 있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질투할 것이다. 굶어죽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있을 것이며, 악독한 정부관료 역시 또 생겨날 것이다. 실상 에드와 알은 한 것이 없다. 그들이 변혁시킨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들은 단지 '성장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강철의 연금술사>를 '교양소설'로 바라보는 이유이다. 

'세상의 이치'를 익히는 것. 

'세상'이라는 이름의 '이치'를 익히는 것.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 것 말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화에서 <강연>은 조금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승리했으나, 승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승리했으나 자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연금술의 세계' 속에서 상상적으로만 승리를 할 뿐, 현실의 맥락으로 들어오는 순간 무능해지기 때문이다. 어떤면에서 말하자면 이 만화는 참으로 정직하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만화인 것이다. 다른 만화였다면 "그렇게 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끝!"하고 처리할 부분에서 현실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다시 에드워드로 하여금 여행을 시작하게 하는 장면에서 끝을 낸다.(여기서도 기차를 타고간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강연> 작가가 지니고 있는 윤리성이다. 멍청한 만화들처럼 "좋아좋아 해피엔딩"이라고 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나쁜놈을 멋지게 박살내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아직 세계는 타락한 상태임을 인지하고 있는 것,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항상 회의를 품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것이다. 아주 묘한 균형감각이다. 위에서 나는 방황하고 있다고 했다. 허나 이것은 이 만화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막말로 현실에서 방황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현실은 언제나 방황의 연속이다. 이것이 이 만화의 대단한 점이다.

 

 

루카치는 근대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 나는 이 여행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알고있다. 이 여행의 끝은 나의 죽음, 나의 실패이다. 하지만 결말을 알고 있는 이 여행을, 이 길을 나는 걷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진정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나는 내 영혼을 입증하러 떠난다(I go to prove my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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